| 여는글 | 공동체는 천재의 구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김선욱 - 숭실대 철학과 교수 swk@ssu.ac.kr 내가 사는 곳이 단지 먹고 잠자는 장소 이상의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것은 불과 몇 년에 불 과하다. 2006년 가을, 마산에 있는 합포문화동인 회의 초청을 받아 회원을 위한 강좌에서 강의를 했 던 것이 내게는 공동체와 마을, 혹은 나의 삶의 터 전에 대해 생각해본 첫 번째 계기였다. 그때가 내 나이 불혹의 중반을 이미 넘어선 즈음이었으니 늦 어도 한참 늦은 때였다고 할 수 있다. 강연 끝난 뒤 뒤풀이 장소에서 성악가인 한 참석 자가 이은상 시인의 시를 붙여 만든 ‘내 고향 남쪽 바다’를 불렀다. 유학시절 이 노래를 눈물겹게 듣 고 또 불렀던 기억이 있어서 가슴이 짠하는 느낌이 있었는데, 마산이 바로 이 노래의 고향이었으니 감 회는 더욱 새로웠다. 다음날 나를 초대한 친구와 그의‘ 절친’들이 마산 관광을 시켜주었다. 마산 3·15의거 기념탑을 들렀 다. 탑 주위를 구경하고 있는 동안 그들이 주위에 떨 어진 쓰레기 줍는 것을 보았다. 자신이 있는 그 장소 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거기에 버려진 쓰 레기 줍는 일은 하지 않는다. 그들은 그 장소뿐만 아 니라 마산을 정말로 깊이 사랑했던 것이다. 둥둥 떠다니는 부평초 같은 삶 거기에 사는 내 친구는 과거 김영삼 대통령 시절 에 외쳐진‘ 지역화’의 구호를 따라 서울에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창원으로 내려왔다. 말뿐이었던 그 구호의 약발은 곧 사라졌고, 친구는 귀향한 지 일년 만에 귀향 결정을 후회했다. 하지만 친구의 선택은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, 그곳에 정말로 뿌리를 내리는 것이었다. 거기서 병원을 열고 지역 사회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여 많은 친구를 사귀었 다. 지금은 그곳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다. 서울로 돌아가는 KTX 열차 안에서 나는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깊이 생각해보았다. 무엇을 하면서 살았는지는 분명했다. 하지만 어디서 살았는지는 내가 한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. 내가 태어난 곳은 부산이지만 어린 시절 울산에 서 잠시 살다가 목포로 옮겨 얼마를 산 뒤 다시 울 산으로 왔다. 그리고 몇 년 뒤에 서울로 와서는 영 등포, 화곡동, 둔촌동, 다시 화곡동, 잠실, 방이동, 그리고 의정부로 갔다가 상계동, 사당동, 중계동에 서 살던 중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. 귀국 후에는 수원, 분당, 용인, 그리고 지금은 광 명시에 자리를 잡고 있다. 이런 나의 삶은 한마디 로 부평초와 같은 것이었다.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물위를 둥둥 떠다니는 부평초 말이다. 그 런 나에게 마산에서의 경험은 내게 고향이 무엇인 지, 그리고 인간에게 고향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가슴 깊이 느끼게 해주었다. 이런 생각을 갖게 해 준 마산은 이후 내게 제2의 고향과 같았다. 단 한 번의 방문으로 말이다. 이후 나는 이러저러한 이유를 만들어 일년에 적 어도 한번은 마산 혹은 창원을 방문해서 그 친구들 을 만나곤 했었다. 갈 때마다 그곳 친구들의 환대 는 오랜 고향동무의 환대와 다름이 없었다. 2010년 봄의 제주도 여행은 내게 마을공동체에 대한 또 다른 생각을 일깨워주었다. 당시 대동철 학회라는 전국규모의 학회에서 ‘평화와 생명’이라 는 주제를 걸고 제주대학교에서 논문발표회를 가 졌다. 발표를 기획했던 충남대의 정 교수는 논문발 표 하나를 위해 멀리 제주까지 오게 하기가 미안했 는지 가족과 함께 여행 삼아 오라고 나를 꼬였다. 결국 그의 말에 넘어간 나는 논문을 쓰느라 진땀을 흘리기는 했어도 가족과 함께 5월의 제주여행을 할 수 있었다. 아들과 아내는 인터넷을 뒤져 여행 코스를 만들었 고, 그 코스를 따라 제주도 동부지역을 렌터카로 돌 다가 김용갑이라는 이름의 사진작가 갤러리를 찾게 되었다. 우리가 방문했던 그 날은 마침 그 작가가 작 고한 지 다섯 해째 되는 날이었다. 갤러리 입구를 들 어서자 기념 음악회가 열린다는 안내문을 읽을 수 있었다. 음악회까지 두어 시간 남아 있었기에 전시 장을 천천히 살펴볼 시간은 넉넉했다. 많은 사진이 대체로 비슷한 포인트에서 찍혔으나 다양한 모습을 담고 있는 놀라운 작품들이었다. 아내는 사진으로 이렇게 큰 감명을 받기는 처음이라고 감탄했다. 그곳에 붙어 있는 설명에 따르면 사진작가 김용 갑은 제주 출신이 아니라 충남 부여 출신이었다. 그런데 그는 여행 중 한라산 중턱쯤 있는 ‘용눈이 오름’에 반해 그만 그곳에 15년 남짓한 세월을 머 물며 작품 활동을 하였다. 그러다 불행히도 그는 루게릭병에 걸렸고, 투병 중에도 많은 사진을 남겨 놓고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. 작가의 주검은 화장되었고 뼛가루는 갤러리의 정원에 뿌려졌다고 했다. 그날 본 정원은 아름답 게 꾸며져 있었는데, 그 한쪽에 심어진 나무 한 그 루가 각별해보였다. 그 앞에는 꽃바구니가 있었고 누가 두었는지 불 붙여진 담배 한가치가 나무 앞의 돌 위에 얹혀 있었다. 아마 그곳에 그의 뼛가루가 묻혔나 싶었다. 음악회는 도립교향악단 실내악 앙상블 팀의 연 주와 성악으로 구성되었고 그 중간에 작가와 깊은 교우관계를 맺었던 시인이 자신의 시를 읽는 순서 가 있었다. 그 가운데“ 나는 시로 사진을 찍지 못했 는데, 그대는 사진으로 시를 썼던 게야”라는 구절 이 인상적이었다. 우연히 들르게 된 이 음악회 자리에서 나는 이 사 람들은 왜 이런 자리를 마련했을까를 생각해보았다.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, 즉 김용갑을 기억하기 위 해서였다. 왜 그곳의 사람들은 그를 기억할까. 그가 용눈이오름을 사랑했고 자기 몸을 바쳐 그 사랑을 사진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. 이렇게 그곳에서는 김 용갑을 중심으로 하나의 기억의 공동체가 만들어졌 다. 그런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김용갑은 제주 사 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.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중심으로 그 지역에 그런 기억의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, 출신이나 혈연관계가 이런 공동체 형성의 필수조건은 아님을 알려준다. 기억 공동체의 진정한 필수조건은 함께 기억할만한 일이고 기억하 고픈 사람이다. 그런 일과 사람이 땅과 어우러지면 서 공동체와 고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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